소설로 만드는 가상세계,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 약칭 ILN의 맛보기 광고입니다. 출처를 밝힌 펌 및 트랙백, 링크 모두 환영합니다. 널리 퍼뜨려주세요.
ILN의 소개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는 1890년의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공동소설창작 프로젝트로, 마스터이자 플레이어인 루나벨 이하 루시카, 먼여행, 박가분, 여름밀감(가나다순)의 다섯 플레이어가 소설로서 가상세계를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플레이어들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캐릭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각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다른 플레이어의 캐릭터와 서로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인물이 다른 인물과 어떻게 인연을 맺고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인물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서로 다른 유형의 플레이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다섯 플레이어의 아홉 캐릭터가 엮어나가는 빅토리안조의 거대한 드라마, 기대해주세요.
예고편
루나벨이 쓰는 <런던 행복론>의 주인공인 '프로스트 잉그램'의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에 있었던 짤막한 일화를 발췌해봅니다.
1870년 9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빅토리아 역은 몹시 번잡했다. 가을이 되어, 휴양지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도련님, 안 내리실 건가요?"
수행인 랄프가 넌지시 물었다. 프로스트는 귀찮다는듯 그를 흘겨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거의 다 하차하는 동안에도 프로스트는 한동안 내릴 생각이 없이 창 밖만 보고있었다. 랄프는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그가 모시기로 되어있는 새 도련님은 나이답지 않은 위압감을 자아내는 소년이었다. 서리(frost)라는 그 이름처럼, 깔끔하고 날카로운 용모와 분위기의 소년. 랄프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하릴없이 창밖이나 내다볼 수밖에 없었다.
긴 기차여행으로 예민해진 아가씨들이 다른 사람과 조금만 스쳐도 질색을 하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고, 나이 지긋한 신사들이 마중나온 하인들에게 끝없이 칭얼거리는 영식과 영애들을 떠맡겼다. 온전한 가족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공기처럼 당연하게 주어져있던, 한가하기 그지없는 사람들. 프로스트는 그들의 모습에서 특색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입고있는 옷부터 태도나 행동거지까지, 그들은 모두 똑같아보였다. 편지에 쓰여있던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 너를 두고 사람들은 무척 시끄럽겠지만, 저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일일이 신경쓰지 말아라.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군집이다. 우우거리며 한꺼번에 이동하는 철새나 벌떼 따위를 생각하면 된다. 네가 떳떳하게만 처신한다면 곧 그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듯이 너를 흔연히 받아들일게야.' 프로스트는 피식 웃었다. 아버지의 조언은 사실 필요 없었다. 프로스트는 지금 빅토리아 역사(驛舍)를 일별한 것만으로도 런던 사교계의 모든 것을 대번에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런던이 승리가 약속되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환성과 열기가 가득한 경마장 같은 곳으로 다가왔다. 프로스트는 좌석에서 훌쩍 일어나 빠르게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랄프가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황급히 짐을 챙겨 낑낑거리며 뒤따랐지만, 프로스트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잉그램 가의 집사가 공손히 그를 맞아 마차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프로스트는 당당하고 거리낌없는 몸가짐으로 걸어나갔다. 14년동안 살아온 스코틀랜드는 그의 머릿속에서 과격하게 밀려났다. 런던이여, 네가 기다리던 내가 왔다. 프로스트는 마차에 올라타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차는 시가지를 지나 고급스러운 식당에 도착했다. 예약석에 앉아있던 콜린 잉그램은 프로스트가 들어서자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오렴, 프로스트 잉그램."
아버지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자 프로스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못본 사이에 부쩍 살이 내려 있었고, 몸집이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가 최근 얼마나 시달렸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한없이 커보였었다. 이따금 콜린이 어머니와 자신을 방문했을 때 그는 스코틀랜드 전체의 공기를 달라지게 할 만큼 큰 존재감으로 다가왔었다. 런던의 언론계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편집장 콜린 잉그램, 창립자 하버트 잉그램의 아들. 수식어도 화려한 아버지는 언제나 하인들을 대동하고 런던에서 샀다는 값비싼 선물들을 들고 오곤 했었다.
프로스트는 콜린이 내민 손을 정중하게 맞잡고 두어번 흔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몸집이 작아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키가 그 사이에 훌쩍 컸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불편한 건 없었니?"
"아뇨, 덕분에. 아버지는 잘 지내셨습니까?"
"그럭저럭. 걱정해주니 고맙구나."
식사가 날라져왔다. 세심하게 신경쓴 조명 아래 놓이는 식기들은 하나같이 반짝거렸고, 윤기있는 기름기가 흐르는 프랑스풍의 음식들이 예술 작품처럼 꾸며져있었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그것들은 과하게 치장한 처녀들처럼 수런거리며 프로스트의 앞에 소복히 놓였다. 프로스트는 서슴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빵을 잘랐다.
"어머니한테서 소식은 없었나요?"
콜린은 프로스트의 질문을 예상했다는듯 대답했다.
"안그래도 어제 편지가 온 참이었다. 그냥, 잘 지낸다는구나. 프랑스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거짓말이다. 프로스트는 음식에는 손댈 생각이 없이 와인으로 입만 축이는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가 프랑스를 무척 좋아하리라는 점에는 의심이 없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영국에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편지에는 파리의 자유롭고 매혹적인 분위기에 도취되고 매일같이 미술관이니 오페라니 다니면서 즐거워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파리의 남자들 이야기도 줄줄이 이어지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과 비난의 말들이 마구 뒤섞여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여자였다. 그건 배려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쉽게 상처받고 그 상처를 억누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까지는 가능해도, 어머니까지 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것쯤은 어머니도 잘 아실 거예요."
콜린의 얼굴이 문득 굳더니, 곧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프로스트는 그의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아버지의 심경을 헤아리기에는 그는 어렸다. 프로스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세실도 브랜윈 가로 돌아가고, 어머니는 프랑스로 가고, 저는 이렇게 잉그램 가로 오고. 그러고보면 모두 있을 곳에 있게 되었으니 잘 됐네요."
콜린은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셸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파국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뼈대있는 무관 가문인 브랜윈 가의 가주의 정부인이었다. 어디 고급 창녀나 과부도 아니고, 어엿한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인과 연정을 나눈다는 것이 영국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그곳이 런던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절제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셸리 역시 남편이 있는 런던이 아닌 자신의 친정이 있는 스코틀랜드였기에 더욱 거리낌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찬란한 풍광과, 복잡다단한 것들에 때묻지 않은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그 땅은 그녀로 인해 더욱 눈부신 낙원과도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결국 이런 것이었다. 콜린은 프로스트가 차라리 자신과 셸리를 원망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프로스트는 지나치게 조숙했고, 부모님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곧 메인 디쉬가 나왔다. 프로스트는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왜, 맛이 안좋아?"
프로스트는 콜린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이프와 포크를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웨이터를 불렀다.
"미디움 레어로 달라고 했을텐데요?"
"그렇게 해드렸습니다만, 손님..."
"제가 미디움 레어라는 영어의 뜻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나이가 어린 자신이 미디움 레어를 주문하자, 배려한답시고 적당히 더 익혀서 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고기가 푸석할 수는 없었다. 프로스트는 웨이터를 차갑게 건너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다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웨이터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접시를 다시 가져갔다. 콜린은 잠잠히 그의 몫의 스테이크를 잘랐다. 저 아이가 잉그램 가의 '서자'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콜린은 뻔히 이어질 결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